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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주의 말씀 / 이상재 목사(함께하는 교회)
2015-07-23 09:40:19   인쇄하기 [trackback]
한국교회신보
 

1. 주님은 시간을 정해놓고 규칙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습관을 좇아 감람산으로 가셨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규칙적으로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했음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때가 되면 식사를 하듯 그렇게 정기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이 습관에 따른 기도가 예수님께 권능을 부여했습니다. 어떠한 죄인이라도 품어 내는 인품을 형성하게 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어디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일이겠습니까? 우리 역시 기도의 습관을 가질 때에 이와 같은 능력과 인품을 능히 소유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비단 기도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좋은 습관을 들일 때에 우리의 인품과 인생은 달라집니다. 세상살이에도 좋은 습관이 그 사람을 완전히 바꿔놓게 되는 것을 봅니다.



예를 들면, 독서의 습관을 기르는 사람은 지식과 논리력, 어휘력의 증가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은 평생을 근면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성경을 읽는 사람은 말씀의 은혜와 능력 안에서 평생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좋은 습관을 길러야 합니다.



2. 주님은 무릎을 꿇고 밤새도록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에게 가신 예수님은 제자들이 '슬픔으로 인하여 잠든 것'을 보셨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된 상황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제자들이었다면 어떻게 해야 했겠습니까? 당연히 깨어 함께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아니 당사자인 예수님보다 사실은 제자들이 더 열심히 기도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제자 된 도리요, 또 자기들이 살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도는커녕 깊은 잠에 들어버렸습니다. 이 모습이 용납될 수 있습니까? 같은 이불을 덮고 자는 부부도 자기의 고민을 전혀 모른채 코를 골며 자는 아내나 남편을 보면 남 같고, 원수 같은 생각이 드는 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3년을 동고동락한 제자들이 그렇게 예수님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음을 알렸는데도 잠만 자고 있으니 예수님인들 어찌 섭섭한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그 순간 제자들의 잠자는 모습만 본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왜 그들이 그 절박한 순간에도 잠이 들었는가를 보셨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은 나 몰라라 하고 잠이 든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자신들 중 한 명이 배반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을 부인할 것이라는 예고에 대하여 슬퍼하다가 잠이 든 것입니다.



본문에서는 정확하게 예수님께서 얼마동안 기도했는지는 분명하게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졸음을 참지 못하고 잠든 것이나 마태복음에 보면 세 번씩이나 기도하셨다는 표현으로 볼 때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기도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이 땅에서의 마지막 밤을 기도로 지새우신 것입니다.



3. 주님은 진액을 짜내듯이, 그리고 목숨 걸고 기도하셨습니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 참으로 기가 막힌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엄청난 긴장이 주어져서 모세 혈관이 파괴되어 피가 땀방울로 흘러 나왔음을 표현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너무나 땀이 많이 나와서 피처럼 뚝뚝 떨어졌다는 의미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되었든지 이 말씀은 주님이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주님의 기도처럼 기도에는 간절함이 있어야 합니다. 위대한 영적 거인들은 하나같이 진액을 짜내듯 목숨을 걸고 기도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결코 대충 시간이나 채우는 형식적인 기도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사생결단을 했습니다. 죽기 아니면 살기로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습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꺾는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겟세마네에서 꺾인 것은 예수님 자신의 뜻이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예수님은 가장 위대한 기도의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꺾는 기도에 주력하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자기의 뜻을 들어 달라고 간구합니다. 금식을 하는 성도도 있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부르짖는 성도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애절한 기도에 충분히 공감을 합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원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야 합니다. '내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뀐다'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나에게 있음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못난 나, 문제투성이인 나는 변할 생각을 안 합니다.



그리고 오직 문제 해결만을 해 달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런 상태에서 문제 해결이 되겠습니까? 또 문제 해결이 된다 해도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곧 또 다른 문제가 기다리고 있고, 생길 것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기도란 하나님의 뜻을 꺾는 기도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4. 주님께서도 유혹과 시험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기도하셨습니다.



기도는 시험에 들기 전에 해야 합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면 기도해야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서 깨어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고 했을 때에 그들이 기도했다면 예수님의 체포와 죽음 앞에서 그들이 그렇게까지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겠습니까? 그렇게까지 비굴하기만 했겠습니까?



보십시오. 그렇게 비참하고 비굴했던 제자들이 나중에 기도하던 중에 성령을 받고 얼마나 당당해졌습니까? 이게 무슨 차이입니까? 바로 기도의 차이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이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을 때에는 기도하지 않을 때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도할 때에는 당하기는커녕 오히려 상대방을 압도했습니다. 권세가들 앞에서도 당당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당황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여러분이 세상을 살아 나가면서 언제, 어떤 일을 당할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것을 누가 알겠습니까? 언제 어느 순간에 어떤 시험이 닥쳐올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에서 시험에 들지 않도록 미리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기도할 때에 어떤 시험이라도 능히 감당할 용기와 힘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겟세마네에서 십자가를 향해 힘차게 발걸음을 내딛던 예수님을 보십시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겠습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 그런데도 기도하지 않겠습니까? 어거스틴은 '기도는 영혼을 지키는 성채이다'라고 했습니다. 마치 적이 쳐들어오기 전에 성채를 지어야지 적이 쳐들어온 다음에 성채를 짓는 사람이 있습니까?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마귀는 기도하는 성도들을 두려워하지만, 그러나 가뭄에 콩 나듯이 어쩌다 한 번씩 기도하는 성도는 별로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러 왔다가 앉기가 무섭게 얼어나 가버리는 성도 역시 우습게 여깁니다. 하는 둥 마는 둥 남의 눈치나 보며 체면치레로 기도하는 사람은 아예 무시합니다. 교회에 와서 앉아 있기는 한데 졸다가 가는 사람들도 무시해 버립니다.



본문에 나오는 예수님의 모범을 좇아 '습관을 좇아' 규칙적으로 기도합시다. '오래 동안' 기도합시다. 주님께서 밤이 맞도록 기도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땀방울이 핏방울 되도록' 목숨을 걸고 기도합시다.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합시다.



제자들이 한시도 깨어 있어 기도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습니까?



사랑의 따스함을 견지하면서도 또한 책망의 매서움도 잃지 않으신 예수님의 책망이 담긴 말씀입니다. 가끔 성도들 가운데는 경책을 하면 아주 속이 좁은 사람으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을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그 사랑이 많으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얼마나 자주 책망하셨습니까?



또 주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리 고을들에 대해 얼마나 엄히 책망하셨습니까?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아시아 일곱 교회에 대한 책망의 말씀을 보십시오. 얼마나 강하게 책망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사랑이 없고 속이 좁음에 대한 반증이 아닙니다.



오히려 책망 없음이 사랑 없음과 관심 없음에 대한 반증일 수 있습니다. 책망한다는 것은 그만큼 사랑한다는 증거입니다. 그만큼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사랑하는 자식 매 한 대 더 든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보면 목회자가 신앙생활 잘하고 봉사생활 잘하는 직분자들을 더 자주 책망하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 성도들은 대단히 섭섭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정말 그를 믿고 사랑하기 때문에 나오는 질책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책망하고 믿기 때문에 질책합니다. 그저 더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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