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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고 / 대안교회 김 창 호 목사(수도노회장)
교회본질로서의 사도성에 대한 소고(小考)
2015-11-19 09:36:23   인쇄하기 [trackback]
한국교회신보
 

■ 초 록 ■



교회란 성경적 원리에 근거하고 있어야만 한다. 이로써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신조들이 고백하고 있는 교회로서의 본질과 속성에 충실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성도자신을 잘 돌아볼 수 있는 스스로의 분명한 기준은 물론이요, 세상을 향한 진리의 빛도 항상 제시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빛'으로서 세상 가운데 '보내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성경에 근거하고 있는 교의학적 교회본질을 바로 세워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란 사도들에 의하여 가르쳐진 '교리의 계승'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사도적 교회'로서의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 고(考)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내적인 생명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반영'으로서의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연속성"을 살피게 되었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로의 연속성은, 하나님은 이미 영원으로부터 자신의 어떠하심을 가지고 계셨으며, 시간 내에서의 경륜적 과정이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형성하는 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존재로부터 정태적(靜態的)이지 않고 역동적인 인격성으로서의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로의 연속성은, 다른 어떤 것들과의 상관관계도 허락지 않는 '하나님의 단일 명칭',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이제 명사적(名辭的) 의미로서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동사적(動詞的) 개념에 주의할 것도 요청 받게 되었다. 이로써 개혁주의 신학이 말하고 있는 '교리적 계승'으로서 '사도적 교회'의 그 본유적(本有的) 성격은 삼위일체 하나님, 아니 더 나아가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께 시원적인 근거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 주제어 >



교리의 계승, 사도적 교회, 사도성, 삼위일체 하나님, 존재론적 삼위일체, 경륜적 삼위일체



Ⅰ. 들어가는 말



교회는 본질적으로 성경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이는 곧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신조들이 고백하고 있는 교회로서의 본질과 속성에 걸 맞는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교회는 성도자신을 잘 돌아볼 수 있는 스스로의 분명한 기준은 물론이요, 세상을 향한 진리의 빛도 항상 제시되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빛'으로서 세상 가운데 '보내심'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교회란 사도들에 의하여 가르쳐진 '교리의 계승'이 잘 이루어지고 있는 '사도적 교회'로서의 연속성이 유지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교회는 교회로서의 그 본질적인 빛을 잃어가고 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써 우리의 현실이다. 이 같은 교회 현실의 특징현상으로는 "신사도 개혁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Movement)과 같이 비정상적인 교회 부흥운동을 무분별하게 도입하고 있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



이 운동에서 나타나는 신학적 문제들은 매우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목회적 문제 또한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며 교회 회복을 목적으로 한다는 명분아래 오히려 왜곡된 성령 이해 등에 의한 혼란과 혼동을 야기시키며 지나친 과업성취를 추구하는 성장지향 주의로 치닫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에 본 연구는, 성경원리에 충실한 교의학적 교회본질에 대한 시원적(始原的) 근거를 살피려고 한다.



그리하여 현대교회가 특히 간과하고 있는 교회의 본질적 속성으로서의 '사도성'에 관한 교회론적 재정립을 도모(圖謀)하게 되기를 원한다. 또한 교회가 역사적으로도 참된 교회로서의 강건함을 회복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오류들이 도전하여 올수록, 오히려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신조들이 고백하고 있는 교회로서의 본질과 속성에 충실한 진리의 빛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교회가 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교회 본질의 시원적 근거



기독교 신학의 체계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교리는 대단히 중요한 진리이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나아가 성경전체의 중심주제인 구속진리의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신 것은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삼위일체론은 기독교와 타종교를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신학적 명제이다.



그런데 개혁주의, 혹은 개혁파 신학의 삼위일체론은 존재론적(혹은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통일성을 매우 중요하게 강조한다. 그리고 그 신학의 기초를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출발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 삼위일체론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존재이심을 고백하게 되지만, 이 세상과의 관계 이전에 이미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삼위일체적이심을 믿고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부터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므로 그의 경륜 과정에서도 자신을 삼위일체적으로 나타내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교회의 사도성'에 대한 시원적(始原的) 근거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교회의 바른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교리에서부터 출발하여 다른 분야들로 적절하게 확장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이에 '교회의 사도성'에 대한 개혁주의 신학의 주된 입장으로서의 '교리의 계승'에 관한 논의 역시 하나님에 대한 교리, 즉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한다.



1. 존재론적 삼위일체



헤르만 바빙크는 말하기를 "교회는 삼위일체론이 아주 뛰어난 교리라고, 아주 뛰어난 종교적 신비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기독교가 존재론적 삼위일체 교리라는 원천과 원리에 근거하였음을 명백히 인식하였다. 또한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의 하나님의 절대적 자기계시와 성신을 통한 그의 절대적 자기부여라는 기독교의 본질은 오직 이 기초(존재론적 삼위일체) 위에서만 주장될 수 있음을 명확히 인식하였다." 라고 하였다.



1) 존재와 상호관계성



헤르만 바빙크가 이와 같이 말하고 있는 바 그 의미, 즉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께 기초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한 교회의 인식에 대한 이해는, 루이스 벌코프의 다음과 같은 논의가 유익하다.



"하나님의 삶은 인격적인 삶으로서 성경 속에서 우리 앞에 분명하게 나타나는데, 물론 하나님의 인격성을 주장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이는 진정한 의미에서 어떠한 종교도, 즉 어떠한 진정한 기도나 진정한 인격적인 사귐, 신뢰할 수 있는 의존, 확신 있는 소망도 결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격성의 원형태는 인간이 아닌, 하나님에게 있다. 하나님의 인격성은 원형적(archetypal)이지만, 인간의 인격성은 모형적(ectypal)이다. …하나님은 삼위격적이다. 그리고 이 삼위격적인 존재는 신적인 존재 안에 있는 필연성이며, 결코 하나님이 선택하신 결과는 아니다. 하나님은 삼위격적인 형태 이외의 어떤 다른 형태로는 존재하실 수 없다. 삼위일체론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논의되어 왔다. 인격성 자체의 개념으로부터 삼위일체론을 논의하는 것은 매우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이상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필연적 존재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성은, 초대교회 갑바도기아 교부들에 의하여 논의된바 있다. 닛사의 그레고리는 그의 논문 '삼신이 아님에 관하여(On 'Not three Gods', Quod non sint tres Dii)'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co-inherence)는 신격의 활동들(operations)이 시간의 표지(mark of time)나 분리된 행위의 구분 없이 함께 행위하면서 셋 모두에 의해 행해진다고 설명한다. '활동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페리코레시스' 원리에로 유도된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성령에로 전달되는 선한 의지의 한 운동과 성향(disposition)이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상호관계성'은 성경에서 분명하게 제공하고 있는 내용이다. 즉 구별된 세 주체들이신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들을 통하여 나타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칼빈도 어거스틴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으며, 헤르만 바빙크 역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맨 먼저 성부의 이름은 구약에서는 신정적(神政的) 의미를 지닌다(민 16:22; 신 32:6; 마 7:11; 롬 9:4 등). 성부는 스스로 모든 것을 소유하는 신성의 원천인 반면, 성자와 성령은 교통을 통해 동일한 존재와 동일한 속성들을 지닌다. 하나님이라는 명칭이 특별히 성부에게 주어지는 것은, 그가 신적 경륜에서 첫 번째라는 것을 가리킨다.(중략)



성자의 명칭들을 통해서는, 성육신 이전에 로고스와 아들로서 존재했으며(롬 1:3, 4, 8:3; 갈 4:4), 하나님의 본체로(ἐν μορφη θεου, 빌 2:6) 존재했고, 부요하며(고후 8:9), 영화로 옷 입었고(요 17:5), 이제는 자신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그 상태로 되돌아갔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된다(고후 3:18; 빌 3:21).(중략)



마지막으로 성령의 이름은 먼저 옛 언약과 새 언약의 모든 책들을 통하여 동일하다. 성경에서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는 다른 신적 존재의 특별한 위격을 가리킨다. 성령은 자신의 특별한 실존 양식(modus subsisteni)으로 인해 이 명칭을 지닌다. 성령은 하나님으로서, 모든 피조물 안에 있는 내재적 생명의 원리다. 진실로 우리는 성령을 통해 다름 아닌 성자와 성부 자체와 직접적으로, 즉각적으로 교제한다. 성령은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 자신이다(요 14:23ff; 고전 3:16, 6:19; 고후 6:16; 갈 2:20 등).(중략)"



이와 같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상호관계성'은, '하나님'이라는 단일한 명칭이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 가운데서 충분하게 전개되었다고 성경은 가르친다. 그러므로 성경이 이렇게 선명하고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바, 하나님의 모든 외적 사역 즉 창조와 재창조 모두는 삼중적인 신적원인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우리의 신앙 교리의 출발이요, 이 신앙이 특징적으로 갖게 되는 '사도적 성격'의 최초근거가 되는 것이다.



2) 존재로부터 기원된 작정교리



개혁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무엇이 일어날지를 주권적으로 결정하셨으며, 또한 그의 예정의 계획에 따라 자연계와 초자연계에 걸친 그의 전(全)창조 사역에서 그의 주권적인 의지를 작용하셨다는 의미에서 주권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에 관한 신학적 모든 논의는, 창조의 사역과 구속 혹은 재창조의 사역에서 하나님 안에 그 출발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음호에 계속>



이와 같은 신학적 원리를 따라 종교개혁자들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속한 영적인 유기체로서의 교회에 주의 집중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과 성령의 새롭게 하는 사역을 떠나서는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던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칼빈도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시라는 사실로서 교회의 삼위일체론적 기원을 제시한다.



즉, 삼위 하나님은 만세 전에 구원을 협약(apctum salutis) 하셔서 구원자(예수 그리스도)와 구원 방식(대속)과 구원 받을 백성들(예정)을 작정하셨다: 구원자로서 작정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대속의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참 하나님과 참 사람으로서 중보자가 되셨다. 참되고 영적인 이스라엘로서 선택된 백성들의 모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자 되심과 함께 작정되었다고 한다.



교회에 대한 칼빈의 이해는 이같이 '존재론적 삼위일체적(immanent-trinitarian) 이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적(economic-trinitarian) 이해를 지향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교회의 기원은 중보자 그리스도로서 사역하시는 성자의 선재라는 개념에 근거(내재적 삼위일체로부터)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그로 말미암아 창조된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primogenitus)로서 불리는 바와 같이(골 1:15) 세상이 창조되기 전에 그는 머리였다고 선지자는 말한다. 세상을 창조하신 동일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머리(caput ecclesiae)가 되셔야 한다. 상실된 모든 것들이 그에 의해서 회복되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선지자가 그리스도의 나오심이 영원부터 라는(egressus Christi esse aetemos)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한다. …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구속하기 위해서 육체 가운데 나타나신 그리스도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한 말씀이었다는 사실과, 그의 은혜와 능력에 의해서 세상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영원한 하나님의 경륜에 의해서 모든 창조물의 첫 열매로서, 특히 교회의 머리로서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이로써 교회는 성경이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요 17:5) 라고 증거하고 있는 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되는 것이다. 또한 이로써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 상호 교제와 사랑과 섬김의 위격 공동체로서 갖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상호관계성에 속한 속성 가운데 시작된 온전한 공동체적 교회론을 갖게 되는 것이다.



영원하신 성자 하나님의 중보자 되심,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되심은 삼위 하나님의 경륜을 드러냄으로써 교회의 기원과 본질과 실재를 계시한다는 것이다. 즉 '교회는 함께 일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자기 계시'라는 것이다. 교회의 기원과 본질과 실재란 "아버지는 기원이 없으시고, 아들은 오직 아버지로부터 나셨고,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출래하셨다"는 초대 교회에 확립된 존재론적 삼위일체적 교리로부터 출발하고 있음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때에도, "'페리코레시스'(περιχώρησις, co-inherence)는 신격의 활동들(operations)이 시간의 표지(mark of time)나 분리된 행위의 구분 없이 함께 행위하면서 셋 모두에 의해 행해진다고 설명한다. '활동의 다양성'은 필연적으로 '페리코레시스' 원리에로 유도된다.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아들을 통하여 성령에로 전달되는 선한 의지의 한 운동과 성향(disposition)이 있다." 라는 원리로서의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를 기억하게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것이 곧 '교회의 사도성'에 대한 시원적(始原的) 근거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2. 경륜적 삼위일체



삼위일체 하나님은 한 본질이시며, 세 위격체로 존재하신다. 그리고 이 안에서의 인격적인 상호관계성을 가지고 계시다. 영원부터 위격적으로 서로 사랑하시고 섬기시며 교제하시는 분이시다. 이렇게 역동적인 상호교제 가운데 존재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창조와 구원의 역사 가운데, 즉 경륜적(economic) 삼위일체의 관계 속에서도 자신의 인격적이며 상호관계인 공동체적 본질을 계시하신다.



1) 존재론적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근거로서의 계시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근거이다. 다시 말하면, 경륜적 삼위일체는 기독교 교리의 원천과 원리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스스로의 계시인 것이요, 영원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작정교리에 대한 반영인 것이다.



다음은 헤르만 바빙크의 '경륜적 삼위일체'에 관한 논의이다.



"바빙크는 말하기를 "존재론적 삼위일체에서 성부가 그 존재 사실의 순서에서 첫째이고 성자가 둘째이며 성령이 셋째이듯이, 계시사에서도 성부가 성자에 앞서며 성자가 성령에 앞서는 것이다." 라고 한다.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보내심을 받으시고(마 10:40; 막 9:48; 요 3:16; 5:23, 30, 37; 16:7 이하), 성신은 성부와 성자 모두에 의해서 보냄을 받으신다(요 14:26; 16:7).



그러나 이 시간 내에서 나오심은 존재론적 삼위일체 내의 삼위 간에 존재하는 내재적 관계의 반영이고 출생과 내어쉬심에 근거한다. 성자의 출생은 로고스의 성육신의 영원한 원형이고 성신께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신 것은 성신의 쏟아 부어주심의 원형이다. 그러므로 교부들은 삼위일체의 삼위 내에 존재하는 영원하고 내재적인 관계들에 대한 지식을 시간 내에서의 이 관계에 대해서 계시된 바로부터 이끌어내었다. 이 일에 있어서 그들은 옳았다."



이와 같이 바빙크는 계시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구조, 즉 경륜적 삼위일체의 구조를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구조와 위격 간 상호관계의 반영으로 볼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교부들이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에서 존재론적 삼위일체에로 추론해 나간 것을 인정하고 그 과정에 동의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바빙크는 경륜적 삼위일체와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구분하며, 경륜적 삼위일체가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반영함을 인정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영원으로부터 자신의 어떠하심을 가지고 계셨으며, 시간 내에서의 경륜적 과정이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형성하는 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변화가 없으시며, 존재론적(내재적) 삼위일체가 경륜적 삼위일체에 계시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어야만 한다. 만일, 경륜적 삼위일체에 의하여 하나님 자신이 더욱 풍성해지거나 그에게는 오직 경륜적 삼위일체가 있을 뿐이라고 한다면, 그 하나님은 역사를 필요로 하시는 하나님이 된다. 이런 하나님은 결코 온전한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항상 존재론적 삼위일체를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로 인정해야 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온전한 존재론적 삼위일체가 영원에 있지 않으면 경륜적 삼위일체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의 존재 근거이고 경륜적 삼위일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식 근거이다."



2)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기원된 작정교리 반영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우리의 바른 인식은, "참으로 성경을 통하여 이미 충분히 입증된 대로 한 하나님의 본질은 단일하시며 분할되지 않는다는 것, 이 본질은 성부, 성자, 성령에게 다 같이 속한다는 것, 한편 성부는 어떤 특성에 의해 성자와 구별되시며 성자도 성령과 구별되신다는 점 등을 확고하게 견지해야 한다."라는 사실을 꼭 기억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렇지 않게 될 경우에는 '아리우스주의'가 주장하듯이 위격의 삼위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본질의 단일성을 희생시키게 되며, 반대로 '사벨리안주의'가 주장하듯이 본질의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위격의 삼위성을 희생시킬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경륜적 삼위일체에 대한 칼빈의 말이다.



"우주가 창조되기 이전에 벌써 말씀이 하나님이셨다고 요한은 확언을 하였지만 그는 말씀과 관념을 완전히 구별하여 놓았던 것이다(요 1:1). 그러므로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신 말씀이 아버지와 함께 계셨으며 아버지와 함께 그 영광을 소유하였다고 하면(요 17:5), 그는 확실히 외부적인 또는 상징적인 광채가 아니라, 필연적으로 하나님 자신 안에 거하시는 한 실재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더욱이 우주 창조사 이외에서는 성령에 대하여 언급된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은 여기서 그림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능력으로 소개되었다. 모세는 혼돈한 덩어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유지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창 1:2). 그러므로 여기서 명백해지는 것은, 영원하신 성령이 항상 하나님 안에 거하셔서 아주 조심스럽게 천지의 혼돈한 물질들을 유지하시며 또한 여기에 미와 질서를 가하셨다는 사실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은, 앞에서 말하였던 바와 같은 존재론적 삼위일체로서의 인격적이며 역동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이미,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할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영원하신 작정으로 이해된다. 성경이 어디서나 출발점으로 삼은 것은, 바로 모든 존재와 발생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의 실현이라는 것이다. 그 원형과 근거 역시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에 있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오직 하나님께서 자신 스스로를 능동적으로 계시해 주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한에 있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기독교의 영속적인 교리적 근거와 인식으로서, 그 계승에 대한 모든 시작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의논에 의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엡 1:4~6)과 같은 구원 받을 백성들에 대한 작정교리에 대한 반영이다.



이와 같은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기원된 작정교리에 대한 반영으로서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이해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의 '새로운 실체 개념'을 고려함도 유익할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곧 "전통적으로 실체는 속성들의 소유자(the owner of proprieties)로 이해되었으나, 에드워즈는 행동들의 행위자(the doer deeds)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그는 실체를 '성향'(disposition)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였다. 성향이나 경향성은 존재론적으로 실재하는 것이며, 법칙적으로 원인적으로 작용하는 힘이기까지 하다. 실재 자체를 정태적(靜態的)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동적으로 보는 것이며, 행동과 사건을 만드는 성향으로 보는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개혁신학의 출발은, 어떤 속성들의 소유자로서의 정태적(靜態的)인 삼위일체로부터가 아니라, 오히려 행동들의 행위자(the doer deeds)로서의 인격적 상호관계성 가운데 계신 동태적(動態的)인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시작하는 신학의 기초가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이때에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의 특징을 온전히 반영하는 '사도적 교회'로서의 연속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3. 존재론적 ․ 경륜적 삼위일체의 연속성



존재론(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연속성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자체이다. 왜냐하면, 이는 존재론적 삼위일체의 인격적이며 역동적인 상호관계 안에서 이미, 시간 속에 존재하고 발생할 모든 것에 대한 그의 영원하신 작정의 연속성으로서의 '그 것'이기 때문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하여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강림을 통하여 자신을 한층 더 명백하게 계시하셨으므로, 삼위에서 보다 친밀하게 자신을 알리시게 되셨다. …주님께서는 신앙의 완전한 빛이 현현되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자 하셨다(마 28:19)는 사실에는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아주 명백해지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 안에 한 하나님으로 알려진 삼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한편, 성경은 성부와 말씀, 그리고 말씀과 성령을 구별한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규명함에 있어서 얼마나 경건하고 얼마나 신중해야 하는가를 그 신비의 중대성이 경고해 준다. …성경이 말하는 구별은, 곧 성부는 일의 시초가 되시고 만물의 기초와 원친이 되시며, 성자는 지혜요 계획이시며 만물을 질서 있게 배열하시는 분이라고 하였으며, 그러나 성령님께는 그와 같은 모든 행동의 능력과 효력이 돌려지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더욱 이 구별은 하나님의 가장 단순한 단일성과 모순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심으로 절제를 사랑하며 믿음의 분량으로 만족하는 사람들은, 알아 두면 유익한 것을 다음과 같은 간단한 형식으로 받아들이도록 하자. 즉 우리가 한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할 때 이 하나님의 명칭은 유일하시며 단일하신 본질로 이해된다는 것이며, 이 본질 안에서 세 인격 또는 세 실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칼빈은 위에서와 같이 위격의 구별과 함께 각 위의 일정한 특성에 따라, 위격 간 상호관계를 말하되, 또한 계속하여 "항상 본질의 단일성"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성자를 가리켜 성부와 다른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가증스러운 신성 모독죄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단일 명칭은 어떠한 상관관계도 허락지 않으며,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에 대하여 이런 하나님이다 혹은 저런 하나님이다 하는 식으로 불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다.



칼빈의 이와 같은 설명들은 "존재론적․경륜적 삼위일체의 연속성에 속한 사도성 이해"에 대한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이해 안에서만, 바로 어떠한 상관관계도 허락지 않는 '하나님의 단일 명칭',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교리적 계승' 차원의 '교회의 사도성'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빙크 역시 "본질 내의 과정은 동시에 하나님의 절대적 인격성, 그의 삼위일체적 존재사실, 그리고 그의 내재적 관계들을 이루는 것이다. 그 과정은 그를 통하여 인간성이 인간과 가족과 인류에게서 온전히 전개되는 모든 과정의 원형이다." 라는 말로써, 우리의 '교리의 계승'에 대한 시원적 근거에 답하고 있다.



또한 "신적 본질 안에 있는 삼위의 상호 관계는 외적으로도 계시된다. 물론 하나님의 외적 사역(outgoing works)은 항상 전체로서의 신적 존재에 속한다. '하나님의 각 위의 순서와 구별은 유지되지만, 하나님의 외적 사역은 구분되지 않는다.' 창조와 구속에서 한 분의 같은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나 이 통일성 안에서 신적 본질 내에 존재의 순서가 보존된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는 경륜적 삼위일체에 반영된다."라는 설명으로 이해를 돕게 된다.



그런데 이 부분에 대해서도,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는 실천성으로 곧바로 연결되어지는 유익이 있다. 에드워즈는 "존재란 비례적 균형, 곧 아름다움"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가 실재에 대하여 성향적 개념을 재구성할 때 나타나는 중요한 결과는, "존재란 더 많은 관계와 행동을 향하는 경향이라는 것이다. 실제적 행동들과 관계들은 그러한 행동들과 관계들을 향한 성향보다 더욱 큰 존재의 정도를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해, 성향들이 계속 발현됨으로써 존재는 더욱 현실적이고 더욱 실제적으로 된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는 '내재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연속성이 신학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생명이란, 신학자들의 사변의 대상이 되는 난해한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살아 있는 진리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 또 모든 역사와 공간 속에 계시는 하나님 자신의 '전달'을 믿는 자가 마음으로 체험하면서 드러나는 살아 있는 진리였다. '신자가 자신의 경험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활동을 체험하는 바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내적인 생명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반영'이라는 이해였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하나님 자신이 자신의 내적인 생명으로 존재하는 방식의 반영'으로서의 "존재론적 삼위일체와 경륜적 삼위일체의 연속성"을 살피게 되었다.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로의 연속성은, 하나님은 이미 영원으로부터 자신의 어떠하심을 가지고 계셨으며, 시간 내에서의 경륜적 과정이 하나님을 규정하거나 형성하는 데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함을 분명히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그 존재로부터 정태적(靜態的)이지 않고 역동적인 인격성으로서의 존재론적 삼위일체로부터 경륜적 삼위일체로의 연속성은, 다른 어떤 것들과의 상관관계도 허락지 않는 '하나님의 단일 명칭', 즉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 교리가 이제 명사적(名辭的) 의미로서의 자리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동사적(動詞的) 개념에 주의할 것도 요청 받게 된다. 이로써 개혁파 신학이 말하고 있는 '교리적 계승'으로서 '사도적 교회'의 그 본유적(本有的) 성격은 삼위일체 하나님, 아니 더 나아가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께 시원적인 근거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Ⅲ. 나오는 말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 정리한 교회의 네 가지 속성, 즉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는 교회론의 기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네 가지 속성을 바르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교회 구성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 받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소명과 사명이 더욱 분명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충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대교회 대부분은 교회의 속성으로서의 '사도적 교회', 즉 '교회의 사도성'에 대하여 지나치게 소홀히 여기거나 간과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 이유들 중에는, 특별히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고 있는 '로마 교회에 속한 사도성'이라는 용어와의 혼동 위험을 가장 크게 염려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원리적으로 참된 교회는, 개혁주의 정통신조들이 고백하고 있는 '사도적 교회' 라는 속성의 연속성 가운데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개혁주의 정통신조를 따르는 교회들이 '교회의 사도성'을 말하게 될 때에는 대부분 사도적 '교리의 계승'이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빙크도 일찍이 "개신교도들은 (사도성에 대하여) '위치와 인물의 계승'이 아니라, '교리의 계승'이 참된 교회의 특징적 속성이라고 올바르게 말했다. 만일 후자가 없다면, 전자는 교회를 참된 교회로 만들 수 없고, 만일 후자가 있다면, 전자는 매우 부수적 의미를 지닌다." 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에 본 고(考)는, 교회의 특징적 속성으로서의 '교리의 계승'이라는 이해의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학의 체계는 삼위일체 교리로부터 출발하여 다른 분야들로 적절하게 확장되는 것이라는 원리 안에서, '교리의 계승'에 대한 이해를 구하게 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사도성'이란, 곧 존재론적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상호관계로부터 그 시원적(始原的)인 근거를 갖는 것임을 밝히게 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시며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삼위일체론적 기원을 제시하고 있는 분이심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는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신조들이 고백하고 있는 교회로서의 본질과 속성에 충실하게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모든 교리의 동인(動因)이 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인격적 상호관계 안에서부터 작정되어진 교회론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내신바 되시고, 사도들에 의하여 가르쳐진 터 위에서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보내심'을 받고 있는 교회의 존재론적 특징을 나타내게 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세상역사 속에서는 비성경적이고 반성경적인 오류들로 인한 그 어떤 도전이 있다할지라도, 오히려 역사적 개혁주의 정통신조들이 고백하고 있는 교회로서의 본질과 속성에 충실한 진리의 빛이 더욱 분명하고 선명하게 드러나는 교회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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